달 뒷면에 식인집단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줄곧 그렇게 말해왔다. 달 뒷면에 사는 그들은 무자비하다. 생존을 위해서는 같은 인간 따위 비정하게 잡아먹고 만다. 여섯 명의 대원들과 함께 달로 떠난 후, 기술적인 문제로 통신이 두절된 뒤 한 달 후에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였던 할머니는, 그래서 밤에 달을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살아 돌아온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밤을 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쉬는 것이 죄처럼 여겨지던 그 때는 밤샘이 미덕이라고 믿었고, 몸이 피곤하지 않으면 제대로 열심히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공부에 집중도 못할 거면서 괜히 딴 짓하며 밤 샐 바에는 푹 수면하는 것이 백 배 낫다는 것을 나는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무...
레이지 미카. 앞의 ‘레이지’가 성이 아니라 게으르단 뜻의 영단어 ‘Lazy’란 사실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항상 반 친구들이 레이지 미카라고 부르니까 어쩔 수 없다. 실제 성은 레이제이. 레이제이 미카. 솔직히 이쪽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별명이 붙은 건 아무래도 그가 교실에 얼굴을 비춘 적이 거의 없는 탓이 제일 클 것이다. 이른바 히키코모리였...
0. 숨바꼭질 5살 때였을 것이다. 유난히 노을이 사나운 붉은색이었던 날이었다. 왜 그랬을까,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될 정도로 해 질 때까지 놀았었다. 누구와 놀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유치원 때 친구 같은 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뒤늦게 귀가하고 나서 부모님께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눈...
눈을 떠 보니 팔다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나의 차가운 몸통만이 푹신한 소파 위에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부엌 쪽에서 무언가를 팔팔 끓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팔다리를 돌려주시면 좋겠는데요.” “넌 로봇이잖아, 팔다리 없어도 괜찮아.”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그가 뒤돌아보...
하나여고 연극부의 유리 선배는 연기의 천재다. 오늘도 나는 유리 선배가 연기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대사, 선배의 움직임, 그 작은 손짓까지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평소에 상냥하게 웃어주는 선배도 물론 좋았지만, 무대 위에 올라서면 마치 빙의된 것처럼 180도 돌변하는 선배는 더더욱...
위-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교실 창문가 자리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중, 나는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문자 메시지의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구겼다. 별로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으나 나는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방과 후 옥상.’ 단 세 단어뿐. 나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에 나란히...
중학생 때의 이야기다. 아침에 사물함을 열어보니 쿠키크림 막대과자가 들어 있었다. "뭐지...... 이런 게 원래 있었나?"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하얀 상자를 꺼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값싼 막대과자였다. 쿠키크림 막대과자는 다른 막대과자보다 500원 비쌌지만, 그럼에도 중학생이 사기에 부담스러운 가격은 결코 아니...
나는 스스로를 탐정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별로 믿지 않는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며 나는 시야를 방해하는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넘겼다. 웅성웅성 떠들썩한 분위기였던 복도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유명한 선도부장이 지금 얼굴 근육을 잔뜩 구긴 표정으로 복도에 등장했으니까.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학생들의 시선을 대충 무시하며 목적지인 2학년...
목요일 아침, 유진은 복도 위에서 한 남학생과 부딪혔다. 그것은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세인과 같이 걸어가던 유진은 세인의 조그맣고 귀여운 얼굴을 감상하느라 앞을 보지 못했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남학생은 핸드폰 너머의 또 다른 귀여운 여학생과 즐겁게 채팅하느라 앞을 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던 세인은 두 사람이 곧 부딪힐 것을 알고 ...
그 날은 유진에게 지옥과도 같은 날이었다. 어느 무엇 하나도 유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늦잠 자서 그만 지각해버린 유진은 1교시가 시작하고 난 뒤에야 자신이 5교시 숙제를 들고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부모님이 그날부터 일주일 예정의 해외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학교로 가져와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그 때문에 오전 내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유...
아침 잠꼬대에서 유진을 깨워버린 건 다름 아닌 커다란 폭발음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유진은 반사적으로 창문으로 달려가 폭발음의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뿌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학교 주변에 커다랗게 피어오른 흙먼지구름뿐이었다. 아마 그 폭발은 학교 쪽에서 생긴 모양이었다. 유진은 방바닥에 널브러져있는 핸드폰을 줍고 기억나는 번호...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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